calmglow가 처음 사회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마치 이 사회가 수퍼맨을 원하는 것으로 보였다. 능력 중심의 이 사회에서 원하는 것은 결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교회에서, 가르침받았던 겸손과 성실과 순종의 미덕이 아니라 강인하고 남성적인 성격의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결코 세상을 이끌어가는 미덕은 그런 강함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다. 의외로 이렇게 강함만을 강조할 것같은 세상에서 어릴적에 배웠던 겸손과 성실과 순종의 미덕을 몸에 걸치고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은 존경과 성공을 거두는 것을 정말로 자주 접하게 된다.
특히 겸손함의 미덕은 자주 나를 감동시키곤 하는 주제이다. 겸손함을 갖춘 이는 그가 낮은 위치에 있거나 높은 위치에 있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주위 사람에게 신뢰를 주고 존경을 받는다. 겸손함을 갖춘 이는 비록 작은 일에 있어서는 피해를 보는 듯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 큰 것을 얻는다. 결코 빈말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겸손함을 갖춘 이들이 가장 무섭고 부럽다.
그렇다면 겸손함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겸손함은 그저 자기를 낮춤이다. 자기를 낮추는 자세이고 낮추는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남을 섬기는 마음은 아니다. 굽신거리는 사람보고 겸손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근데 몸과 마음을 굽신거리면서 낮추지 않고 어떻게 겸손함을 꾀할 수 있을까?
주역의 64괘 중에서 유일하게 6효가 모두 길한 괘는 오직 하나 '겸(謙)'일 뿐이다. 주역 겸괘를 보면 다음과 같이 겸손함을 찬사하고 있다.
'하늘의 도는 찬 것을 일그러뜨려 겸손한 자를 보태어주고, 땅의 도는 찬 것을 변화시켜 겸손으로 흐르게 하며, 귀신은 찬 것을 해치고 겸손한 자를 복주며, 사람은 찬 것을 싫어하고 겸손한 자를 좋아한다.'이런 까닭에 64괘 중 겸(謙)만이 완전히 복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복됨의 지름길이라고 하는 겸손함의 자세는 무엇일까? 먼저 겸손의 반대인 교만의 뜻을 알아보면 어떨까?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 따르면 교만함에는 7가지가 있다고 한다.
- 만(慢): 가문,재산,외모,재능 등으로 우열을 나눠 자기보다 열등한 자에 대해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첫번째 교만함이다. 사람의 가치는 결코 소유에 의해 차별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유적 가치로 존재적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첫번째 교만이라는 것이다.
- 과만(過慢): 가문,재산,외모,재능 등에 대하여 자신과 대등한 자에 대하여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두번째 교만함이다.
- 만과만(慢過慢): 가문, 재산, 외모, 재능 등이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 대해서도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번째 교만함이다. 첫번째 교만도 문제이지만 두번째와 세번째 교만에 이르면 정말로 교만의 극치이고 더더욱 문제인 상태이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왕자병이나 공주병이라고 부른다. 이런 상태에는 약도 없다.
- 아만(我慢): 어떠한 가치 기준도 필요없이 무조건 자기만이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네번째 교만함이다. 자기의 존재적인 가치만이 세상에서 유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증상만(增上慢): 실제로는 아무런 성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깨달음과 작은 지식으로 마치 모든 것을 알고있는 것처럼 타인을 가르치려하고 군림하려 함이 다섯번째 교만함이다. 정신적으로 타인을 지배하려는 이러한 교만함을 가진 이가 앞서 이야기한 어떤 교만보다도 세상을 더 어지럽힌다.
- 비하만(卑下慢): 가문, 재산, 외모, 재능등에 대하여 자신은 무조건 타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섯번째 교만함이다. 이것이 어째서 열등감이 아니고 교만함인가? 없음으로 인해 비하감을 느끼는 이는 있게 되었을 때 반드시 교만하게 될 사람이기 때문이다. 열등감은 교만함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 사만(邪慢): 덕이 없으면서도 덕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여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이 일곱번째 교만함이다.
겸손함이 교만하지 않음을 일컫는다고 한다면 위에서 제시한 일곱가지 교만함을 항상 주의한다면 겸손함에 이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겸손함이 교만하지 않는 수동적인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겸손함은 자존감의 힘으로 완성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자존감, 자존심이라는 것은 겸손과는 별개의 혹은 반대편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기 고집이 대단한 사람에게 자존심이 강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생각해보면 자존심은 결코 겸손함과 그리 관련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진정한 자존심, 자존감은 어떤 외부의 물질적인 가치 기준이 아니어도 스스로 존재의 가치가 소중함을 아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존심은 대개 외부의 어떠한 가치에 대한, 이를테면 명예와 부 혹은 관계같은 것들에 기대어있지만 진정한 자존심은 아무런 외부적인 잣대에 굴하지 않고 모든 존재가 소중함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즉, 교만하지 않으며 스스로 진정한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 겸손에 이르는 길이고 우리 선조들이 일상에서 끊임없이 수행하였던 길과 통하는 것이 이 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존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대체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가 지금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무언가에 기대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일까?
'소유냐 존재냐'에서 에릭 프롬은 현대인을 소유의 양식을 지향하는 이들로 묘사하고 있고 우리가 지향해야할 목적지로서 존재적 양식을 제안하였다. 저자는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집필의 이유를 들고 있다.
'무한한 진보라는 저 위대한 약속 - 자연의 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리고 방해받지 않는 개인적 자유 - 이 산업 시대가 시작된 이래로 여러 세대의 희망과 믿음을 지탱해주어 왔다'하지만 저자는 단호하게 이를 부정한다. 즉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이 복지를 가져다 주지도 않으며, 또한 행복이나 최대의 쾌락에로 나아가는 길도 아니다.
우 리가 우리 자신의 삶의 독립적인 주인이라는 꿈은,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취미가 모두 정부와 산업, 그리고 이들이 통제하는 매스컴에 의해 조작되며, 우리 모두가 관료주의적 기계 장치속에서 일하는 톱니바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끝장나 버렸다.
경제적 진보는 부자 나라에만 한정되어 왔으며,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간격은 계속 더 벌어져 왔다.
기술진보 그 자체가 생태 위기와 핵 전쟁의 위험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 중 어느 하나 또는 이 두가지가 결합해서 모든 문명, 어쩌면 모든생명을 끝장나게 할 지도 모른다.
와 같은 이유에 의해 우리에게 더 이상 자본주의라는 낡은 체제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위기가 발생했는가? 여기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소유하려는 욕망을 극대화하는 현대 사회의 특징이 바로 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소유하려는 열망은 경제 체계의 끊임없는 발전을 필요로 하고 자연에 대해 경멸감을 갖게 하며 파괴와 소비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여 인간성의 종말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저자는 소유의 본질은 무엇이고 그것에 반대되는 보다 나은 세상과 삶을 위한 자세로서 존재의 본질을 제시하였다. 그렇다면 소유의 본질은 무엇일까? 현대인은 어떻게 소유를 통해 존재함과는 다른 의미로 허기짐을 채우고 있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소유의 본질을 정의하고 있다.
소유 양식에 있어서는 나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살아있는 관계가 없다. 그것과 나는 사물이 되어 버렸으며, 내가 '그것'을 소유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역의 관계도 성립한다. 즉, '그것이 나를 소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아이덴티티 의식이, 즉 내가 나라는 의식이 나의 '그것'(그리고 되도록이면 많은 물건들)에 대한 소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생존의 소유 양식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살아 있는, 생산적 과정에 의해 이룩되어 있지 않다. 소유 양식은 주체와 객체 양쪽 모두를 '사물들'로 만들어 버린다. 그 관계는 죽어있는 관계이지 살아있는 관계가 아니다.즉, 소유 양식에 머물러 있는 한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진정한 관계역시 맺을 수 없고 소유 양식에 기반한 잣대에 의해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여 영원한 교만함의 기반에서 삶을 지탱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불안한 삶의 영역에서 '존재 양식'으로의 전환을 제안한다.
존재 양식에 없어서는 안될 선행 조건으로 자립,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이 있다. 존재 양식의 근본적 특성은 능동적인 데 있다. 그러나 외적 활동이나 바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내적활동, 인간의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능동적이라는 뜻이다. 능동적이라 할 때 그것은 모든 인간이 천부적으로 타고난 능력, 재능, 풍부한 재질 등을 드러냄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성장하고, 흘러 넘치고, 사랑하고, 자신의 고립된 자아라는 감옥을 초월하고, 관심이 있고,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고', 주는 것을 뜻한다.즉 이러한 스스로 존재함의 상태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겸손과 교만 그리고 자존감 등은 이미 오래전 성자들에 의해 누누히 강조되었던 결코 잊어서는 안될 미덕이고 수행의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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