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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칼럼

직장인의 금요일 저녁은 한달에 한번 있는 월급날 만큼이나 더 없이 풍요로운 시간이다. 이 풍요로운 시간에 막걸리 한잔에다가 퇴근 전에 평소 나를 귀여워(?)하는 직장 선배로부터 막 빌려온 송은일이라는 여!류!작가의 '딸꾹질'이라는 소설책을 펴놓고 calmglow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들로만 묶어서 스피커로 울리게 하면 내 방에는 미래도 과거도 없는 여실하게 현재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된다. 가끔 술에 취해 노래 박자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깨가 들썩이고 드디어 결국은 함박 웃음으로 거울을 바라보며 춤을 추고야 만다. 으하하. 지화자 소리 아니 나올 수 없는 시간이다.
한참을 책을 읽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선배가 이야기한 김훈 이야기에 끌려 그가 예전에 한겨레에 썼던 칼럼을 재차 읽어보는데 이건 정말 왠만한 소설이나 시보다도 더욱 간담을 서늘케 하면서도 막판의 반전을 이끌어내는 것이 영화 식스 센스 울고 갈 정도의 몇 번 깨어났다 죽었다 하면서 존경해도 모자르고 모자를 한 저널리스트의 명작들이 아닌가? 한손에는 막걸리잔 들고 너무나 유쾌한 칼럼들을 읽어가며 희열을 느끼고 있다. 신문기사를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고간 김훈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선배는 비록 혀를 끌끌 찰지 언정 나는 이래서 남류작가의 컨텐츠를 사랑하지. 지화자.

그의 칼럼 몇 개만을 옮겨 적어본다.

'밥'에 대한 단상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 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라파엘의 집


서울 종로구 인사동 술집 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몰려들어 언어의 해방구를 이룬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술버릇이다.

그 술집 골목 한복판에 `라파엘의 집’이라는 불우시설이 있었다. 참혹한 운명을 타고난 어린이 20여명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다. 시각·지체·정신의 장애를 한 몸으로 모두 감당해야 하는 중복장애아들이다. 술취한 지식인들은 이 `라파엘의 집’ 골목을 비틀거리며 지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전 한닢을 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의 집’은 전세금을 못 이겨 2년 전에 종로구 평동 뒷골목으로 이사갔다.

`라파엘의 집’ 한달 운영비는 1200만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1천원이나 3천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서 이 시설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후원자는 800여명이다. `농부'라는 이름의 2천원도 있다. 바닷가에서 보낸 젓갈도 있고 산골에서 보낸 사골뼈도 있다. 중복장애아들은 교육이나 재활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안아주면 온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는다.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머나먼 청와대


거리집회는 허가가 필요없는 신고제라고 하지만, 경찰은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다. 경찰은 신고된 집회의 내용, 인원, 장소, 시간 등을 분석해서 `금지통고'를 할 수 있다. 이 통고를 어기고 강행하면 집시법에 따라 사법처리된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 1가 1번지 앞 인도는 청와대를 향해 외치는 많은 시위의 `북방한계선'이다. 이 거리는 좁은 골목 하나를 사이로, 옥인동과 신교동으로 나뉜다. 신교동이 청와대쪽이다. 골목 건너 신교동쪽으로는 집회가 금지되어 있다. △인원 100명 이하 △거리행진 불가 등의 조건으로 이 20평 정도의 공간에서 집회는 허용된다.

이 거리는 주거지역으로, 통행인이 많지 않다. 시위의 파급효과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요즘 이 한적한 거리는 시위의 명소로 꼽히고 있다. 청와대와 가장 가까운 시위장소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청와대쪽으로 마이크를 들이댄 사람들이 `제발 아들들의 일에 대해 무슨 말 좀 해 달라'고 외친다. 같은 장소를 놓고, 시위대들끼리 시간을 조정하기도 한다. 청와대 동쪽 춘추관 옆에는 큰 북이 걸려있다. 국민의 소리를 듣겠다는 상징조형물이다. 서쪽인 옥인동 거리에서 북은 연일 울린다. 그러나 그 너머의 청와대 거리는 적막하고 북악산의 신록은 눈부시다. 옥인동 거리는 청와대 거리에서 가장 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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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으로의 존재

calmglow가 처음 사회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마치 이 사회가 수퍼맨을 원하는 것으로 보였다. 능력 중심의 이 사회에서 원하는 것은 결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교회에서, 가르침받았던 겸손과 성실과 순종의 미덕이 아니라 강인하고 남성적인 성격의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결코 세상을 이끌어가는 미덕은 그런 강함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다. 의외로 이렇게 강함만을 강조할 것같은 세상에서 어릴적에 배웠던 겸손과 성실과 순종의 미덕을 몸에 걸치고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은 존경과 성공을 거두는 것을 정말로 자주 접하게 된다.

특히 겸손함의 미덕은 자주 나를 감동시키곤 하는 주제이다. 겸손함을 갖춘 이는 그가 낮은 위치에 있거나 높은 위치에 있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주위 사람에게 신뢰를 주고 존경을 받는다. 겸손함을 갖춘 이는 비록 작은 일에 있어서는 피해를 보는 듯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 큰 것을 얻는다. 결코 빈말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겸손함을 갖춘 이들이 가장 무섭고 부럽다.

그렇다면 겸손함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겸손함은 그저 자기를 낮춤이다. 자기를 낮추는 자세이고 낮추는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남을 섬기는 마음은 아니다. 굽신거리는 사람보고 겸손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근데 몸과 마음을 굽신거리면서 낮추지 않고 어떻게 겸손함을 꾀할 수 있을까?

주역의 64괘 중에서 유일하게 6효가 모두 길한 괘는 오직 하나 '겸(謙)'일 뿐이다. 주역 겸괘를 보면 다음과 같이 겸손함을 찬사하고 있다.

'하늘의 도는 찬 것을 일그러뜨려 겸손한 자를 보태어주고, 땅의 도는 찬 것을 변화시켜 겸손으로 흐르게 하며, 귀신은 찬 것을 해치고 겸손한 자를 복주며, 사람은 찬 것을 싫어하고 겸손한 자를 좋아한다.'

이런 까닭에 64괘 중 겸(謙)만이 완전히 복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복됨의 지름길이라고 하는 겸손함의 자세는 무엇일까? 먼저 겸손의 반대인 교만의 뜻을 알아보면 어떨까?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 따르면 교만함에는 7가지가 있다고 한다.

  1. 만(慢): 가문,재산,외모,재능 등으로 우열을 나눠 자기보다 열등한 자에 대해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첫번째 교만함이다. 사람의 가치는 결코 소유에 의해 차별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유적 가치로 존재적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첫번째 교만이라는 것이다.
  2. 과만(過慢): 가문,재산,외모,재능 등에 대하여 자신과 대등한 자에 대하여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두번째 교만함이다.
  3. 만과만(慢過慢): 가문, 재산, 외모, 재능 등이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 대해서도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번째 교만함이다. 첫번째 교만도 문제이지만 두번째와 세번째 교만에 이르면 정말로 교만의 극치이고 더더욱 문제인 상태이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왕자병이나 공주병이라고 부른다. 이런 상태에는 약도 없다.
  4. 아만(我慢): 어떠한 가치 기준도 필요없이 무조건 자기만이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네번째 교만함이다. 자기의 존재적인 가치만이 세상에서 유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5. 증상만(增上慢): 실제로는 아무런 성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깨달음과 작은 지식으로 마치 모든 것을 알고있는 것처럼 타인을 가르치려하고 군림하려 함이 다섯번째 교만함이다. 정신적으로 타인을 지배하려는 이러한 교만함을 가진 이가 앞서 이야기한 어떤 교만보다도 세상을 더 어지럽힌다.
  6. 비하만(卑下慢): 가문, 재산, 외모, 재능등에 대하여 자신은 무조건 타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섯번째 교만함이다. 이것이 어째서 열등감이 아니고 교만함인가? 없음으로 인해 비하감을 느끼는 이는 있게 되었을 때 반드시 교만하게 될 사람이기 때문이다. 열등감은 교만함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7. 사만(邪慢): 덕이 없으면서도 덕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여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이 일곱번째 교만함이다.
겸손함이 교만하지 않음을 일컫는다고 한다면 위에서 제시한 일곱가지 교만함을 항상 주의한다면 겸손함에 이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겸손함이 교만하지 않는 수동적인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겸손함은 자존감의 힘으로 완성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자존감, 자존심이라는 것은 겸손과는 별개의 혹은 반대편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기 고집이 대단한 사람에게 자존심이 강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생각해보면 자존심은 결코 겸손함과 그리 관련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진정한 자존심, 자존감은 어떤 외부의 물질적인 가치 기준이 아니어도 스스로 존재의 가치가 소중함을 아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존심은 대개 외부의 어떠한 가치에 대한, 이를테면 명예와 부 혹은 관계같은 것들에 기대어있지만 진정한 자존심은 아무런 외부적인 잣대에 굴하지 않고 모든 존재가 소중함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즉, 교만하지 않으며 스스로 진정한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 겸손에 이르는 길이고 우리 선조들이 일상에서 끊임없이 수행하였던 길과 통하는 것이 이 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존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대체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가 지금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무언가에 기대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일까?

'소유냐 존재냐'에서 에릭 프롬은 현대인을 소유의 양식을 지향하는 이들로 묘사하고 있고 우리가 지향해야할 목적지로서 존재적 양식을 제안하였다. 저자는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집필의 이유를 들고 있다.

'무한한 진보라는 저 위대한 약속 - 자연의 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리고 방해받지 않는 개인적 자유 - 이 산업 시대가 시작된 이래로 여러 세대의 희망과 믿음을 지탱해주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단호하게 이를 부정한다. 즉

  •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이 복지를 가져다 주지도 않으며, 또한 행복이나 최대의 쾌락에로 나아가는 길도 아니다.

  • 우 리가 우리 자신의 삶의 독립적인 주인이라는 꿈은,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취미가 모두 정부와 산업, 그리고 이들이 통제하는 매스컴에 의해 조작되며, 우리 모두가 관료주의적 기계 장치속에서 일하는 톱니바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끝장나 버렸다.

  • 경제적 진보는 부자 나라에만 한정되어 왔으며,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간격은 계속 더 벌어져 왔다.

  • 기술진보 그 자체가 생태 위기와 핵 전쟁의 위험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 중 어느 하나 또는 이 두가지가 결합해서 모든 문명, 어쩌면 모든생명을 끝장나게 할 지도 모른다.

와 같은 이유에 의해 우리에게 더 이상 자본주의라는 낡은 체제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위기가 발생했는가? 여기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소유하려는 욕망을 극대화하는 현대 사회의 특징이 바로 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소유하려는 열망은 경제 체계의 끊임없는 발전을 필요로 하고 자연에 대해 경멸감을 갖게 하며 파괴와 소비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여 인간성의 종말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저자는 소유의 본질은 무엇이고 그것에 반대되는 보다 나은 세상과 삶을 위한 자세로서 존재의 본질을 제시하였다. 그렇다면 소유의 본질은 무엇일까? 현대인은 어떻게 소유를 통해 존재함과는 다른 의미로 허기짐을 채우고 있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소유의 본질을 정의하고 있다.

소유 양식에 있어서는 나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살아있는 관계가 없다. 그것과 나는 사물이 되어 버렸으며, 내가 '그것'을 소유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역의 관계도 성립한다. 즉, '그것이 나를 소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아이덴티티 의식이, 즉 내가 나라는 의식이 나의 '그것'(그리고 되도록이면 많은 물건들)에 대한 소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생존의 소유 양식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살아 있는, 생산적 과정에 의해 이룩되어 있지 않다. 소유 양식은 주체와 객체 양쪽 모두를 '사물들'로 만들어 버린다. 그 관계는 죽어있는 관계이지 살아있는 관계가 아니다.

즉, 소유 양식에 머물러 있는 한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진정한 관계역시 맺을 수 없고 소유 양식에 기반한 잣대에 의해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여 영원한 교만함의 기반에서 삶을 지탱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불안한 삶의 영역에서 '존재 양식'으로의 전환을 제안한다.

존재 양식에 없어서는 안될 선행 조건으로 자립,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이 있다. 존재 양식의 근본적 특성은 능동적인 데 있다. 그러나 외적 활동이나 바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내적활동, 인간의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능동적이라는 뜻이다. 능동적이라 할 때 그것은 모든 인간이 천부적으로 타고난 능력, 재능, 풍부한 재질 등을 드러냄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성장하고, 흘러 넘치고, 사랑하고, 자신의 고립된 자아라는 감옥을 초월하고, 관심이 있고,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고', 주는 것을 뜻한다.

즉 이러한 스스로 존재함의 상태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겸손과 교만 그리고 자존감 등은 이미 오래전 성자들에 의해 누누히 강조되었던 결코 잊어서는 안될 미덕이고 수행의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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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 부자들이 살게된 이유

대도시에서 부자들이 사는 구역과 빈민들이 거주하는 구역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아주 분명한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파리의 경우는 부자구역이 서쪽에 빈민구역이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바람이 바다에서 육지로, 곧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것과 관계가 있다. 결국 부자 구역의 악취와 오염물질이 날아와 빈민구역의 대기를 더럽히곤 하는 것이다. 그와는 달리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같은 미국의 대도시에는 현재 부자구역이 변두리에, 빈민구역이 도심에 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땅이 넓은 그 나라에서는 새로운 구역은 으레 외곽에 건설한다. 그 결과 도심이 낡은 구역이 되어 버린다. 그런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경찰은 구역을 그렇게 배치하는 것에 또 다른 이점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 이점이란 빈민들은 도심에 있기 때문에 포위당하기가 쉽고, 변두리에 있는 부자들은 도망치기가 쉽다는 것이다.

출처: 베르베르의 상대,절대,지식의 백과사전 중에서

위에서 언급한 대도시의 구역배치를 서울에 도입해보면 꽤나 설득력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아직까지 강북지역에 알토란 부자들이 무시할 수 없는 비중으로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울의 부자들이 머물고 있는 동네라고 하면 강남을 떠올리게 된다. calmglow 역시 회사가 강남 그 중에서도 도곡동에 있다보니 거주지를 강남에 잡고 싶어도 그 비싼 땅값으로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으며 일단 강남에 산다고 하면 그를 다시 한번 쳐다보면서 업수이 여길 수 없는 재력을 백그라운드로 가진 이라고 저마다 생각하게 된다.
이 강남이 어떻게 이토록 갑자기 부자구역으로 자리매김했느냐면, 여러 설이 있겠지만 여러 음모론을 제외하자면 역시나 6.25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970년대는 아직 6.25의 충격이 가시지 않고 여전히 전쟁의 공포로 온 나라가 전시체제에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서울에 살던 이들은 6.25때 한강교가 무너지면서 겪어야 했던, 강남으로의 피난 자체가 힘들어져 결국 고립될 수 밖에 없었던 공포를 기억한다. 때문에 다시 한번 전쟁이 터질 때 빨리 피난을 가기 위해 강남이 안전성에서 주시받게 되었던 것이다. 마치 부자 구역이 변두리에 있는 미국의 대도시의 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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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mglow다움. 그리고 백창우의 빈집

한 몇 달? 그래 몇 달동안 조금 calmglow답지 않은 것들에 희망을 걸어보았다. 낯선 것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기쁜 마음을 준다. 그것의 향기가 비록 calmglow가 추구하던 가치와는 닿아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과 같이 손잡고 발 구르면 그것이 그렇게 기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한 동안 낯선 것들과 만나다보면 calmglow는 점점 더 calmglow다움에 빠져든다. 미안하게도 calmglow는휘황찬란한 햇빛보다는 적적한 빛이 어울린다. 잠자고 먹고 입는 것의 화려함보다는 소박하고 비움의 공간에 눈길이 가고 어느 하나 헝클어짐이 없이 탄탄하고 완전무결한 헤비메탈보다는,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엄청난 희열을 느끼게 함에도 불구하고 calmglow 내면을 깨우는 것은 코드 네다섯개 밖에 쓰이지 않는, 정말로 단조롭지만 나직한 시같은 노래다.
빛깔 화려한 많은 칵테일을 손수 만들어 먹는 재미와 쉐이커 흔드는 재미 그리고 스윙재즈 틀어놓고 탄성지르며 혼자 칵테일 꼴깍 기울이는 것도 재미 쏠쏠하기 그지 없건만 calmglow는 여전히 흐릿한 촛불 아래 허름한 탁자 위에 놓인 탁한 막걸리 한사발이 술다운 술같다.
달큰하고 진한 커피의 향과 맛 참으로 매력적이건만 calmglow는 여전히 얼룩진 차포 위에 놓인 깊고 은은한 빛깔의 녹차 한잔이 영혼을 깨워준다.
양복 빼입고 포도주 한잔 마시며 칼로 쓸어 먹는 스테이크도 그 쫄깃함과 향기 일품이건만 어째 calmglow는 하얀 비계 풍성히 붙어있는 삼겹살에 옥상 텃밭에서 갓 딴 싱싱한 상추 싸서 먹는 것이 배를 더 채운다.
calmglow는 calmglow. calmglow는 calmglow다움으로 깊어질 일.

오늘 우연히 백창우 선생님이 기형도의 '빈집'으로 만든 노래를 들었다. 백창우 선생님은 김익승 스승님과 막역한 사이의 시인 및 가수, 동화작가이시다. 백창우 선생님의 시는 언제나 calmglow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 백창우 선생님의 '빈집'을 들어보라. calmglow는 이 노래가 너무 좋아 며칠을 계속 이 노래만으로 시간을 보낸다.

공지영이 어느 소설엔가 이런 말을 했다지. 예술가라는 존재는 낚싯대의 낚시찌같다고. 낚싯대의 찌처럼 춤 추는 존재. 어둔 물속에서 물고기가 1밀리 미터쯤 미끼를 잡아당기면, 혼자서 그 열 배 스무 배로 춤을 추어서 겨우 1밀리미터쯤 잡아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 그 우스꽝스러운, 그래서 우리가 알고도 피하고 모르고도 피하고 무서워서도 피하는 생의 가지가지 모든 고통들이 실은 인생의 주요 질료라는 것을 알려주는 존재가 바로 예술가라고.

시가 만약 그러한 열배 스무 배로 춤춰서 건진 1밀리미터라면, 노래는 그러한 시를 다시 백배 천배 춤추는 몸짓이라고 calmglow는 생각해. 백창우의 '빈집'은 바로 그런 몸짓이 아닐까.



빈집.mp3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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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Developerworks SOA세미나를 다녀와서 Enterprise

IBM Developerworks에서 주최하는 한국 IBM SOA 세미나가 삼성동 코스모 타워에서 열렸다. 주최하는 당사자 이야기로는 기존의 SOA세미나와는 다르게 미국 IBM의 랩에서 직접 보다 전문적인 기술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프로그램을 준비하였다고 하여 내심 기대하였으나 그 기대에는 미흡했던 내용으로 일찍 자리를 뜨게 되었다. 대상자가 순수 국내 개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SOA하면 그 초점을 CEO나 관리자 레벨에서 개념을 설명했을 뿐 그 이면에 진행되고 있는 여러 기술적인 이슈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고 주로 제품 설명 위주의 세션으로 인해 흥미를 반감시켰다고 생각한다. 물론 SOA라는 주제가 충분히 비즈니스 중심적인 것이고 그 부분에서 IBM이 강점을 가지고 있으며 개발자에게 SOA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손에 와닿는 식으로 하루동안에 전파한다는 것이 힘들겠다라는 것은 이해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싼 돈 들여서 외국 엔지니어를 모시고 왔는데 기존의 세미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라는 것은 아쉽기 그지 없었다. 세미나실 바깥에 마련되어 있던 로보코드 경진대회를 바라보면서 로보코드와 SOA 그 사이를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무척이나 아쉬웠던 자리였다. 오전에 자리를 채우기 위해 멍하니 앉아있기가 그러해서 혼자 생각해보았다. 보다 재밌고 위트가 있는 실습 예제로 ESB와 BPM 및 비즈니스 모델링을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를 준비해보는 것은 어떠할까? 왠지 가능할 것만 같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조금 발걸음이 가벼워져 돌아갔다. 조만간 그 주제를 내용으로 이 블로그에 채우려 한다. 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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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ies

These days, I'm very happy. I've thought that thirties is festival of life. And now I'm on the start line.
I work well in the office. My job is very exciting and I have a dream of my career.
In my spare time, I study TaiChiChuan. It's good for health of mind and body.
I like listening to music. But I'm on further acquaintance with rock music. The Led zeppelin is so fantastic!!
I went to the lake near the hwing-sung,Kangwon-do for fishing with my old teacher last week. Oh.. fishing is very very so interesting!
I'm thirties. It's festival of life. And now I'm on the start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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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and harmony

I think value is not problem of choice, but harmony. If there are two roads have different way each other, I believe we can go through the new and harmonious way. I believe there is a way to harmony anytime and anywhere. I think the most important thing is the attitude of belief.
가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조화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만약 서로 상충하는 두 개의 길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두 개의 길을 조금씩 양보하여 제 3의 길을 두 손 잡고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느 곳에서건 조화로운 길은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을 믿는 그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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