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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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몇년간 나를 의문에 빠지게 만들던 몇 가지 요소들에 대하여 답 혹은 구체화된 무언가를 던져주고 있다.

비이성 시대의 종말

최근 나는 모호하고 신비적인, 하지만 내가 꽤나 좋아하고 지향했던 인문/종교/철학적 가치들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한의학을 비롯한 동양철학과 명상일텐데, 젊었을 때에는 동양철학이 마치 이 세계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리라는 믿음에서 희망을 갖고 그것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것들이 가진 모호함과 신비주의에 반발감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나의 직업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변화를 보다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더 많은 생각을 스스로 한 덕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문제는 그동안 나의 미래의 대안이라고 생각해왔던 그런 가치들이 무너진 이후에 나타났다. 비록 종교나 명상 혹은 동양철학이 모호하고 신비적이어서 믿을 수 없는 요소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절차가 그러했을 뿐 그것들이 지향하고 있는 바는 보다 명료했다. 즉, 완벽한 삶의 평화와 지고지순하고 절대적인 인생의 가치가 그 안에 있다는 희망이었다. 다른 어떠한 것들도 나에게 그러한 절대적인 희망을 주지 못했었다. 하지만 최근에 진화생물의 발전에 힘입어 알게된 진실을 접하고 나서 갑작스런 진공의 경험, 혹은 팍팍하고 짭짜름하며 비린 흙내음의 경험을 하고 나서 나의 글쓰기는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 이제까지 내가 추구했던 보이지 않는 가치들은 무슨 소용이었던거야?’

생명은 특별하지 않아

그런 연후에 내가 택한 것은 보다 합리적이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고민들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확실하게 현실, 이 자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를 크게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어떻게 보면 더더욱이나 어려운 주제를 탐구해갔는데, 그럴려면 조금 잔인하더라도 최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인류 또는 인류를 뛰어넘는 생명이라는 존재에 대해 최근까지 어떠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탐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이다. 비교적 오래전 저서이고 이제 충분히 대중적인 인식인 이 책을 뒤늦게 나마 읽어보며 깨닫게 된 것은, 아니 인정하게 된 것은 인간이라는 종은 특별하지 않다이다. 또한 인간인 나 역시 전혀 특별하지 않으며 어떤 거대한 담론이나 가치 역시, 그것이 너무 큰 기대를 가진 형이상학에 머무를수록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사실 알고 싶었던 것은 유전자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그래서 진화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가 사실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생물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특성, 살고자 하는 본능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이다. 내가 보았을 때,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생명은 생명을 유지하려는 속성을 가진다. 그것이 진화를 지속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도킨스는 그러한 생명의 특질은 그저 선택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결론짓는다. 심지어는 무생물의 경우에도 이러한,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하려는 특성은 발견되고 있음을 들고 있다. 때문에 가장 생명체적인 특징인 살고자 하는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자연 현상일 뿐인 것이다. 가장 기저의 의식을 이루고 있는 살고자하는 본능조차도 자연 현상이라면 그 본능을 덮고있는 그 외의 번식등의 욕구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무생물에서 유생물로 변화해가는 과정 자체는 아직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최소한의 가능성 즉, 생명체는 무생명체와 마찬가지로 그 모든 특징을 이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신성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가능성을 그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인생

만약 생명이 무생명과 다르지 않은 합리적인 자연 현상의 일부일 뿐이라면 인간이 특별할 이유는 적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기계적으로 생명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과연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가치란 무엇이며 이루어야할 가치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몰입이 그대를 구원할 것이다

절대적 가치를 가기 위해서는 충분히 좌절할 필요가 있다. 도킨스의 사상은 좌절케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까지 꿈꿔왔던 절대적인 가치? 그 무언가는 갈수록 우리의 선택에서 멀어진다. 그런 와중에 만나게 된 책은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의 재발견’이었다. 그의 몰입의 발견에 이은 몰입 종결자?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의 몰입에 대한 찬사를 넘어 사회의 공진화를 위한 개개인의 몰입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그에 앞서 도킨스의 진화론을 예로 들면서 진화론의 거대한 흐름앞에 더이상 다른 신비적인 삶의 덫은 의미가 없다고 강변한다. 즉, 진화론을 인정해야하며 진화론을 인정하고 나와 사회 그리고 인류가 진화해 나아감이 결국은 가장 최선의 선이며 절대적 가치임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이해한다. 진화론의 입장에서 진화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그렇기에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진화를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게 개개인의 능력과 행복의 수치를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어쨌든 거대한 진화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니까. 즉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몰입해서 인생을 즐길수 있을만큼 즐기라구. 단 그것이 진화에 도움되는 방향이어야 해. 되도록 짝을 지어서 더 큰 힘이 되도록 노력하고 말이지.’ 그런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이미 진화에 동참하고 있다. 충분히 삶을 즐기고 생각하며 몰입하고 사회조직 내에서 좋은 쪽으로 무언가를 항상 생각해오고 있으니 좋은 밈을 이 사회에 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애초에 비록 신비하고 모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달콤했던 절대적인 가치들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하다. 더 나아짐의 목표가 더 나아짐이라니, 나는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단 말이다.

적당하게 살면 되는 것일까?

더 나아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부하면 한만큼 알게된 것은 많으되 동기 부여 측면에서는 결국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조화로운 인생을 살아야해’라는 결론에서 더 나아간 것은 없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더 삶을 알차게 살기 위해 시간관리 방법론도 체계화시켜 적용하고 더 효율적인 삶의 습관들을 정립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최고의 가치를 위한 행위는 아니다. 그저 그렇게 살지 않는 것보다는 더 나아보이기 때문이다. 더 낫고 뿌듯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정과 열광에 빠지게 하지는 않는다. 그 어떤 행위에도 일정한 거리가 있다. 결코 완벽한 올인을 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한몸이 되어 절대적 가치를 주지 않는 이상 그것에 미칠 이유는 없다. 적당한 조화와 적당한 거리, 그것이 절대가 없는 상황에서의 나의 최선의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질(Quality)과 선(禪) 그리고 지고한 마음

그렇다면 과연 이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앞서의 책과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일까? 이 책은 엄밀하게 말하면 앞서의 절대적 가치란 무엇이냐를 궁금해서 읽은 책은 아니다. 실제 이 책도 뭐 그런 절대적 가치 자체를 이야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 처럼 보인다. 나 역시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책은 앞서 설명했되었던 몰입이라는 주제와 연장선에 있다. 그리고 오히려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엔지니어링이라는 주제와 내 마음속에서만 담아오던 인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취향 사이를 교묘하게 연결시켜 나를 좀더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를 주고 있다. 엔지니어링이면서 예술과 인문학을 사랑하는 나는 결코 서로 이질적인 대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내가 좀더 가치있는 인생을 살게 하는, 질(Quality)높은 삶의 형태에 이르게 하는 도구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그 이질적인 두 대상을 엮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엔지니어링, 예술, 인문학이 지향하는 더 추상적이고 고차원적인 근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명료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 대상이 컴퓨터이건 음악이건간에 그 대상과 나 사이를 관통하는 질이 있고 나는 사실은 그 질과 소통하고 그 질을 통해 영감을 얻고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것. 그렇기에 그것이 어떠한 것이건 충분히 질과 교류할 수만 있다면 선의 극히 명료하고 하나가 되는 체험에 이를 수도 있으며 기계공학적인 깨달음도 이를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동양의 선이라는 것, 그것이 추구하는 것이 그저 지은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저 주체와 객체가 하나되는,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내가 질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지 아니면 더 높은 가치를 의미하는 지는 확실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선이라는 지극히 높은 목표가 너무 신비적이어서 그것을 배제하고 그것보다는 현실적인 명상이라는 차원으로 옮겨보면 명상의 목표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 외부와 내가 하나되는 마음, 외부에 반응하는 나를 관조하는 특성, 즉 결국은 마음의 어떤 지고한 단계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의 단계이며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질과 충분히 반응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나는 이미 몰입을 즐기고 있었다

즉 이 책은 결코 절대적 가치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절대적인 가치의 문제로 보였던 참선이나 명상이라는 지고의 것들을 보다 낮은 단계로 충분히 끌어내려준다. 그래서 ‘아 명상도 결국 프로그래밍과 실제로는 다르지 않네’라는 안심(?)을 남긴다. 아울러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도 결국 엔니지어의 길이고 명상가의 길이고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세상의 가치를 찾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